2.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정치 사상가들과 제비뽑기
13세기 코뮌 건설자들은 관직을 둘러싸고 파당이 분열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선거부정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준다는 이유로 추첨(제비뽑기)을 선거와 결합했다. 14세기 피렌체는 행정관을 선출할 때 예비 선정위원회 승인을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비밀 투표를 실시해 3분의 2 이상을 득표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죽 가방에 넣은 뒤 무작위로 선택하는 추첨(제비뽑기) 방식을 취했다.
한편 베네치아의 최고 지도자인 도제를 선출하기 위하여 추첨(제비뽑기)과 비잔틴의 선거제도를 혼합했다. 이 방식은 13세기 후반에 시작해 주후1798년 공화국이 붕괴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이 시기에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 역시 비슷한 추첨(제비뽑기) 제도를 실시했다.
베니스 공화국의 원수를 제비뽑기로 선출했다.
세계에서 제일 복잡한 선거는 16세기의 베니스 공화국의 선출 방법이었다. 여기선 1천6백명이나 되는 국회 의원 중에서 제비로 30명을 뽑는다. 다시 그 30명을 제비로 뽑아 9명으로 줄인다. 9명은 40명의 대표를 선거로 뽑는다. 선출된 40명 중에서 다시 제비로 12명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떨어뜨린다.
그 12명이 이번에는 25명을 선출해 낸다. 25명은 다시 제비로 9명으로 줄인다. 9명은 45명을 뽑고 선출된 45명은 제비로 11명으로 줄인다. 이리하여 남은 11명이 41명을 선출해 내고 그 41명이 비로소 원수를 뽑는 최종 유권자가 된다. 원수는 이 41명 중에서 25표를 얻으면 당선이 된다.
이렇게 모두 제비뽑기 4번, 선거 4번을 거쳐서 선거인이 제비뽑히는 것이다. 마치 돌을 추려내기 위하여 바가지로 수없이 쌀을 이는 것과 같다. 제비뽑기를 자주하는 것은 사전 공작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서이다.
처음부터 9명을 제비로 뽑아도 될만한데 그렇잖은 것은 선거의 의식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베니스 공화국이 직접선거를 펴지 않은 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직접선거제라면 능력이나 인품과는 상관없이 유명해진 사람이 선출되기 쉽다.
또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다는 이유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위험이 있다. 더우기 개인의 야심과 대중의 횡포가 결합되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래서 직선제를 피하고 복잡하기는 하지만 가장 투명하고 공평하고도 기묘한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병행하여 원수를 선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베니스 공화국에서 실시한 바 있는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학연과 지연과 혈연 등으로 나뉘어서 망국병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 대선과정에 도입하여 실시한다면 획기적으로 타락한 선거문화와 풍토를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를 국가 선거관리 위원회에 제안한다.
1) 마키아벨리
이러한 사례에 자극받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주후1520년 새로운 피렌체 정체에 관한 제안이 담긴 “피렌체 정부의 재구성에 관한 논고”에서 임명, 선거, 추첨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형태를 결합한 헌법 초안을 제시했다. 마키아벨리가 추첨방식을 포함 시킨 것은 선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뇌물수수, 후원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공화주의의 이상이 베네치아를 통해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으로 전파됐으며 그 과정에서 17세기가 시작할 무렵 영국에서도 전국 단위는 아니지만 특정한 지방에서 추첨제가 확립됐다. 그레이트 야머스에서는 시장, 지방 행정관, 의회 의원을 선출할 때 선거 분쟁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추첨과 선거를 결합한 방식을 주후1835년 시장 선출 때까지 300년을 넘게 사용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바스크의 몇몇 마을, 스위스의 주 한 곳에서 역시 베네치아식 선거제도를 사용했다. 또한 주후1945년 선거법 개전 이전까지 산마리노에서는 도시 국가 수준에서 추첨제(제비뽑기)가 시행된 바 있다.
2) 영국의 공화주의 사상가 헤링턴
한편 17세기 영국에서 공화주의 사상으로 큰 명성을 얻은 헤링턴은 가상의 오세아나 공화국을 통해 추첨(제비뽑기)의 개념을 공화주의 정부의 전체적 도식이라는 맥락 속에 포함시켰다.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격변기이던 주후1792년 9월에는 추첨(제비뽑기)과 투표를 결합한 헌법제안이 제출되기도 하였다.
3)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
18세기의 정치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제비뽑기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다. 제비뽑기는 그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는 선발 방식이니 각각의 시민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희망을 달라"고 했다. 이처럼 몽테스키외는 제비뽑기를 통한 선출을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4) 루소의 사회계약론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제비뽑기와 민주정을 선거와 귀족정에 연결시킨다. 제비뽑기와 선거는 ‘정부’를 선택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두 가지 절차로 제시된다. 루소는 몽테스키외를 인용하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면서 ‘제비뽑기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는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시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탁월한 역사적인 통찰을 가지고 제비뽑기에 대해 논의했다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주장의 논리 정연함이 두드러진다. 사실 루소 자신은 제비뽑기의 민주주의적 성격에 대한 몽테스키외의 해석이 기본적으로는 논리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불충분하게 논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헤링턴, 몽테스키외, 루소라는 우수한 정치 저술가들은 그들 각 각의 입장과 방법을 통해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정인 반면, 제비뽑기가 탁월한 민주적인 선발 절차라는 동일한 주장을 설파했다. 즉 제비뽑기는 대의 정치가 만들어진 시기의 이론적 지평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적인 권위자들 사이에서 추첨과 선거가 지닌 각각의 특성에 대해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원칙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5) 테르미도르 반동
테르미도르 반동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주후 1793년부터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가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그 이듬해인 1794년 그 가혹함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들에 의해 숙청을 당해 자코뱅파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을 말한다.
주후 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매주 및 매달 열리는 입법의회(500인회 원로원)에서의 좌석 배치를 추첨(제비뽑기)으로 정할 것을 결정했다. 이 조치는 의원들 사이에 물리적인 의미의 경계(이익을 위한 권역)가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추첨(제비뽑기)은 여전히 파당을 막으려는 시도와 맞물려 있긴 했지만, 부차적인 방법으로 논의되었다.
혁명론자들은 해링턴, 몽테스키외, 그리고 루소의 권위에 호소했고 초기 공화국들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러나 영국이나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그 누구도 추첨(제비뽑기)을 통하여 공무를 배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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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정치 사상가들과 제비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