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는 삶'이 주는 은총
파송받아 새로운 임지로 떠나면서 기독인의 삶을 묵상함
김영봉(필봉) jhkim@newsnjoy.co.kr [조회수 : 1961]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자칫 바쁜 일상이 사막과 같이 황량할 때가 있다. 묵상적 삶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말씀'이 우리가 선 상황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함께 나누자는 것이 이 지면의 목적인가 봅니다. 그러므로 글 쓰는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이 글을 부탁받은 시점에 저는 국가적인 거대한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말씀이 이끄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동안이나마 세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큰' 문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할 만큼 개인사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 특별한 상황에서 깨달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거대 담론만이 아니라 개인의 미시 담론도 그것이 개인의 실존 근저에까지 닿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울림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의지해 말씀을 시작합니다.
제가 소속해 있는 교단은 미국연합감리교회입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처음부터 '파송 제도'를 채택했고 지금까지 그 제도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와 대비되는 것이 '청빙 제도'입니다. 청빙 제도는 개체 교회가 담임목사 후보들을 검토하여 선택하는 제도입니다.
반면, 파송 제도는 감독이 감리사(한 지역에 상주하면서 그 지역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을 보살피는 목사)의 도움을 받아 개체 교회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목회자를 선정해 보내는 제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해당 목회자와 해당 개체 교회의 의견이 어느 정도 고려되기는 하지만, 감독이 수긍할 수 있는 명백한 이유가 없는 한 그 파송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 제도가 매우 전제적인 것처럼 느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정하는 사람들과 그 결정을 받는 사람들이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마음으로 행하면 청빙 제도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이로울 수 있습니다.
삶의 주권을 다른 이에게 맡기니
저는 올해 감독의 파송을 받아 새로운 임지로 떠납니다. 이 글이 나올 때쯤이면 새로운 목회지에서 짐을 풀고 있을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쉽지만, 그간의 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선택과 결정 혹은 제가 섬겼던 교회의 선택과 결정은 이 과정에서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와 제 가정 그리고 제 사역의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순종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객지 생활을 하면서 저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숙한 것이요, 남자다운 것(반대로 하는 것이 여자다운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이요, 신앙적인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결정은 내가 한다'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오십 줄에 들어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에 제 미래를 맡기려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의 파송에 순종하면서도 속으로는 '기회가 되면 이 제도의 개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겠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며칠 전에 <The Upper Room>(<다락방> 기독교서회 펴냄)에 나와 있는 성서 일과를 따라 출애굽기 14장13~14절을 읽었습니다. 이집트 군대에게 추격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이르러 절망하고 절규하며 모세에게 항의할 때, 모세가 한 말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는 구절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적지 않은 번역본들이 14절을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므로, 네가 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니 내가 할 일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나는 아무 일도 안해도 된다'라고 오해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우리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요 5:17).
우리의 일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진행되고, 완성되도록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주권과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되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어 가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는 말씀에서 제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가 내린 결정을 따르는 것이 매우 귀한 영적 훈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유, 자주, 민주, 민권, 인권 같은 이념들이 최고선으로 인정받는 이 시대에 그리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권장하는 '소비자 주권 시대'에, 파송 제도 같은 '골동품'이라도 남아 있어 내 삶의 주권을 잠시나마 유보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지켜보는 기회가 있었음에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삶의 궁극적인 주인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아야 하며, 진정한 주인이 자신의 삶을 이끄실 수 있도록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행동을 볼 수 없습니다. '나'라는 '비늘 같은 것'(행 9:18)이 영적 시야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분주한 삶은 '배신의 증거'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이 시대는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도 세속적인 사고방식에 오염되어 14절을 '내가 여호와를 위해 싸울 것이니,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오독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실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면서 스스로의 삶을 사막으로 만들고 스스로 자초한 갈증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요즘 영성 신학자들이 '묵상적 삶'(contemplative life)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영성 생활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가 알아채기 이전부터 무슨 일인가를 하고 계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영성 생활은 일어났으면 싶은 일들을 이루도록 하나님을 강제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금 하고 계신 일을 알아차림으로 그 역사에 응답하고 참여하며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과정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목회자의 책임은 먼저 묵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성도들을 같은 길로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새로운 사역지에서의 무거운 책임을 앞에 둔 시점에서 말씀을 통해 제게 영적 생활의 본질을 다시 기억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김영봉 / 워싱턴한인교회 담임목사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분주한 삶으로 몰아세웁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만, 분주하게 사는 것은 유진 피터슨 말대로 '헌신의 증거가 아니라 배신의 증거'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주한 삶'의 반대말은 '한가한 삶'이 아니라 '묵상적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거할 줄 아는 삶,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있을 줄 아는 삶, 하나님에게서 일의 동기를 찾고 목표를 찾는 삶,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시도록 내드리는 삶, 그분의 영광 앞에서 물러서 감사드리는 삶…그런 삶이 아니고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 삶의 사막화를 막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이 푸르른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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