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제비뽑기
2007년 2월 27일(화) 오후 6:04 [경향신문]
〈권태운/ 화곡고 교사〉학급 담임을 하다 보면 자리를 정하는 문제로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자유롭게 자리를 앉게 하면 아무래도 끼리끼리 몰려 앉아 면학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더구나 학급 학생수가 홀수인 경우에는 늘 외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매주 월요일마다 자리를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다. 자연히 새로운 친구와 짝을 이루어 사귀게 되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예방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몰래몰래 자리를 바꾸어 앉기도 하지만.
청소 당번도 조별로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하여 돌아가면 공휴일이 적건 많건, 시험기간이든 아니든 크게 불평이 생기지 않는다. 모두들 순순히 자신이 뽑은 결과에 승복한다.
교내 체육대회 때 축구나 농구 시합의 토너먼트를 정할 때나 교직원 친목 바둑대회 때에도 제비뽑기를 하지만 학교에서 제비뽑기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담임교사 제비뽑기일 것이다. 교사들도 어떤 아이들과 만나게 될까 궁금하겠지만 학생과 학부모들도 어떤 담임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학교생활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교무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정보전’을 펼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사립학교 특성상 교사들의 이동이 거의 없고 저학년 학생들도 선배들을 통해 선생님들의 성향을 잘 아는 터라 담임이 발표되면 약간의 희비가 엇갈린다. 자기네들끼리 부러워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어머니들도 알음알음 새 담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느라 전화 통화시간이 늘어나는 듯하다. 학교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교과 협의와 개인의 희망, 그리고 근무 형평을 고려하여 학년 담임을 정하고 나면 제비뽑기로 반을 정한다. 물론 학생들은 제비뽑기 하기 전에 전년도 성적에 따라 과정별, 선택 과목별 분반이 되어 있다.
올해 첫 담임을 하시는 선생님에게 “순간의 선택이 일년을 좌우하니까 뽑기 잘하세요. 그리고 젊은 기운으로 저도 파이팅 한번 해주세요”라고 하면서 웃음을 주고 받았다.
반을 정하기 위한 제비뽑기를 할 때마다 유년시절 학교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새점’을 치는 것을 지켜보던 때가 떠오른다. 조심스럽게 점괘의 쪽지를 펼쳐보고 만족해 하는 사람, 아쉬움에 한 번 더 해보는 사람, 덤덤히 일어나 쪽지를 구겨서 던져 버리는 사람. 누군가 구겨서 던져버린 쪽지를 주워들고 마치 나의 운명인 양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던 어린시절, 점괘의 내용은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아직도 제비뽑기를 할 때면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올해도 반을 정하는 제비뽑기를 하고 학급명단을 받았다. 거기에는 학생 이름과 성적을 나타내는 숫자만 적혀있다. 이제 그 이름들의 얼굴을 가슴에 새겨 넣어야 한다. 그리고 1년 후에 ‘새점’의 쪽지처럼 추억을 잘 접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훗날 그 쪽지를 펼쳐보는 큰 아이들이 “아~ 선생님…” 하였으면 하고 기대하며….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0
17852
1191
996 
마넹은 비민주적 제도라고 여겨온 제비뽑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