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이 민주주의를 구축할 때 만든 두 가지 장치가 투표와 제비뽑기입니다. 의사결정에는 투표를, 집행자의 결정에는 제비뽑기를 사용했습니다. 집행자에 대한 제비뽑기를 통해서 예비 집행자들이 사회적 권력을 만들면서 구축해 놓은 모든 사회적 위계를 카오스로, 無로 돌려 놓습니다.
진정한 자유의 심연이고 민주주의의 보증자인 셈이죠. 그리스가 중우정치로 비난받았던 이유는 투표보다는 도편추방과 이 제비뽑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 (그 중 개인적으로 우월한 자)가 집행자가 되기 위한 더 나은 위치에 두는 것을 방지했으니까요.
제비뽑기는 거기에 뽑혔을 때와 뽑히지 않았을 때의 benefit 차이가 아주 클 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민주주의적 장치입니다. 그 전제는 그 대상이 평등하거나 능력이 비슷 혹은 무의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 대의적 민주주의에서 집행자나 대표자 선출에 제비뽑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전제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롤스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생명 앞에서 모두가 절대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약간의 필요적 차등을 둘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을 보면 사도들끼리 뭘 선출해야 할 때 선거를 사용하지 않고 제비뽑기를 사용하는데, 이는 사도들이 그리스 지역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고 또 이집트, 유대 등 동지중해 연안지역이 수백년간 그리스의 영향력 안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을 합의나 이론으로 할 수 없을 때 만든 민주주의적 장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위계적 유기체적 사회적 질서 속에 구축되어 있는 개인이 언제든 개체들로 낱낱이 흩어져 카오스로 변모할 수 있는 심연(자유의 심연) 위에 구축된 질서입니다 (슬로보예 지젝).
개인이 본인이 속한 위계적 질서 속에서 빠져 나와 모두가 같은 값으로 변모하는 사회적 해제를 겪는 것 중의 하나가 투표입니다. 그렇지만, 투표를 통해서도 다수의 민중의 이익으로 결정이 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비밀 투표함 안에 그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자신의 밥줄을 쥐고 있었던 지배층이 불어넣은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더욱이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적 합리적 판단을 하기보다 우선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고, 자신에 대한 투표가 금지되어 있다면, 본인이 속한 사회적 질서에서 가까운 순서로 투표할 것입니다. 투표가 완전히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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