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대학은 박제 지식인 양성소？
‘21세기 학생이 20세기 교실에서 19세기 교과서로 공부한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 대한 자조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다. 일본의 한 공무원이 고교 과학 교과서의 내용을 조사해 충격적인 결과를 공개했다. 20세기가 끝난지 2년이 다 돼가건만 화학 교과서의 70%,물리의 40% 가량이 19세기 발견에 대한 소개로 채워졌다. 20세기 업적은 고작 10%. 21세기에 아직도 이미 용도폐기된 뉴턴 역학을 읊고 있는 셈이다.
“교양이란 각 시대가 소유하고 있는 이념의 체계”라고 한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기준에선 일본 최고의 엘리트라는 도쿄대 법학부 졸업자도 야만인에 불과하다. 법학부 학생이 첨단 과학을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교 때 배운 과학은 19세기 것들 뿐이고 대학에선 전문 기술을 전수받기 바쁘다. 도쿄대의 목표는 정확하게 스페셜리스트 양성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아는 소설가,법을 아는 예술가,시를 읊는 분자 생물학자는 일본 대학이 원하는 생산물이 아니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평론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저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를 통해 “일본 대학이 교양 없는 바보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기구가 되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일본은 머지 않아 지적 망국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출간돼 일본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문제작.
저자는 일본 고교 교육·입시 제도의 실패와 대학 교육 전반의 붕괴 현상을 일본 대학의 역사와 특수성,각종 통계 등을 토대로 설득력있게 논증해냈다. 입시 제도에서 대학 운영까지 교육 시스템이 비슷한 우리로선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무릎칠 이야기가 많다.
저자에게 교양은 세분화돼가는 학문을 통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눈을 갖는 일. 대학은 교양인을 키우는 게 첫번째 사명이지만 일본 대학은 교양있는 지식인 대신 법률가,회계사,행정가 같은 스페셜리스트를 만드는 데 골몰해있다. 물론 스페셜리스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 분야에 대한 무지는 일상적 감각의 결여로 드러난다. “1엔짜리 동전이 0.1㎝라거나 종이의 두께가 1㎜ 이상이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대답을 듣다 보면 도쿄대 학생들은 바보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고교 시절 부실한 교양 교육은 전공 분야에서도 문제로 드러난다. 많은 학생들이 뉴턴 역할을 모른 채 기계공학을,생물학을 이수하지 않은 채 의학을 전공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나폴레옹을 술 이름으로 알고 있는 학생에 관련된 웃지 못할 이야기”는 차라리 코미디.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는 이유는 ‘융통성 있는 교육’이란 캐츠프레이즈 아래 교과목을 줄여온 일본의 교육 개혁과 관련있다. 입학하기가 가장 까다롭다는 도쿄대의 경우에도 문과 지망생은 과학 대신 사회 두 과목,이과 지망생은 사회 대신 과학 두 과목 시험만 치르면 된다. 문과생이 과학을 공부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이과 지망생 역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중 두 과목만을 선택하면 되므로 생물을 이수하지 않고 의대를 입학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사정이 이러니 고교생의 수학 능력은 나날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올초 서울대 신입생 상당수가 수학 지진아로 보충 수업을 받는다는 보도 이후 대두된 고교생의 학력 저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사한 교육 체제와 개혁 과정을 거쳐간 일본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될만하다.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의 폐해 역시 한심한 지적 능력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공개한 도쿄대생들의 답안지 대다수는 낙제점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미래 관계’라는 주제의 한 남학생의 답안을 보자. “지금은 문화를 자연에 영합시킬 때가 왔다고 하는데,문화만을 생각하고 다방면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문화는 한없이 발전할 것이다. 현실적으로,현재까지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희생해왔다” 요령부득의 문장이다.
저자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무엇보다 공교육이 정상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대학 교육 개혁을 위해 저자는 제비뽑기로 학생을 선발하자는 기발한 주장을 내놓는다. 기존 방식으로 3분의1,특정 과목에 강한 학생을 3분의 1,그리고 제비뽑기로 3분의1 뽑아 선발 채널을 넓힌 뒤 엄격한 학사 관리로 학생들을 탈락시켜 졸업생의 질을 높이자는 것. 또 시험장에 사전과 컴퓨터 등을 지참하도록 허용할 것,중·고교 과정을 5년으로 통합하고 교양 과정 3년·전문 스쿨 3년으로 대학의 학제를 개편하자는 획기적인 주장도 내놓았다.
물론 학제 개편의 전제가 되는 것은 학생 개인의 노력. 교양이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니까. 저자는 100명이 넘는 강의실에 학생을 모아놓고 옛 노트를 되풀이 읽는 강의를 듣는 것보다 책 한권을 읽는 것이 교양을 쌓는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양인이 되고 싶은 이여,대학에 얽매이지 말도록. 저자의 제안이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현대적 교양이 무엇이며 어떻게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를 적어놓았다. 현대 사회의 지적 지도를 대강으로나마 파악하는 것이 첫째.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고 정보를 파악해 대처 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미디어를 이해하고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는 커뮤니케이터로서의 능력,팀을 만들어 활용하는 능력 등이 저자가 생각하는 현대적 교양이다. 저자는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회사를 나온 뒤 도쿄대 철학과에 다시 입학해 그뒤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다치바나 다카시·이정환 옮김·청어람미디어·1만3000원).
이영미기자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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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선 자의 복 (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을 제비뽑다) 
